영화이야기

다가오는 것들, 철학적인 삶?

낡은등대 2019. 12. 25. 21:09

 

J는 어느날 내게 죽고 싶다고 했다.

그 사람에게 가끔 들었던 말이었지만

그날따라 덜컥 겁이 났다.

정말 자살을 각오한 것 같진 않았지만

삶에 대하여,

가족을 황망히 잃은 상실감에 대하여,

복잡해진 인간관계에 대하여,

남은 가족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본인의 처지에 대하여,

그 밖에 자신을 옭아매는 것들로부터

지쳐버린 것이 명료하게도 내게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순간

진정으로 날 탓했다.

생을 아우르는 거대한 목적 따윈 없고

생존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삶을 꽉꽉 눌러채우고 있는 것 뿐이라며

내 잡소리를 

몇번이고 지껄였던 것을 말이다.

 

 

삶에 불쑥 나타나는 사건들에 대한

나탈리(이자벨 위페르)의 처연한 태도가 떠오른다.

 

하지만 나탈리는 파비앵(그녀의 급진주의 제자)의 지적처럼

사실 앎과 삶을 치밀하게 동일선에 두는 것 같지 않다.

부르주아라는 파비앵의 지적은

일면 타당한 구석이 있다.

 

물론

파스칼, 쇼펜하우어, 레비나스 등

극중 인용되는 실존주의 계열 학자들을 고려해볼 때

삶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힘들지만 한숨 한번 쉬고 응수해내는

그녀의 삶의 태도 자체가

이 영화의 주제 의식임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외람되게도

꼭 그런 사람들의 삶만 철학적인 건 아니겠지 싶다.

죽음을 기다리고

삶에 대한 일말의 기대 없이

사건들을 방관하기만 하는 그런 사람들의 태도 속에도

일면 철학은 숨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삶의 방식, 그 비관적이고 낙담한 마음이

어떤 철학의 모태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