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등대 2020. 3. 30. 00:13

구덩이 속으로 내려간 J의 모친의 관 위로 장례의 집례자로부터 시작해서 모인 회중이 모두 흙을 뿌릴 차례가 되었을 때, J의 부친은 관 위로 올라앉아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목이 끓는 소리로 울었다. J는 관을 밟아도 되는 것인지 잠시 머뭇거렸고 곧 관으로 따라내려가서는 엎드려있는 부친의 겨드랑이를 잡아 끌고 땅으로 올라왔다. J의 여동생은 혼절하기 직전이었고 고창의 적토는 비가 내린 탓인지 더욱 붉게 젖어있었다. 습기 탓에 이름 모를 벌레들이 땅 위로 많이 기어나와 있었지만 J의 여동생은 결국 그대로 젖은 땅 위에 주저앉아 넋을 잃었다. 얼이 빠진 여동생을 부축한건 J의 누나였다. 누나는 출국하기 전보다 살이 빠졌는지 얼굴이 수척하고 어깨가 왜소했으며 머리는 어디서 잘랐는지 모르게 엉망이었다. J는 감각이 예민해지는 느낌이었다. 수많은 것들이 보였고 애도소리는 빗소리와 함께 뒤섞여 와글거렸다. J는 관으로부터 부친을 힘겹게 떼어놓고 정신없이 포크레인 기사에게 노임을 넣은 봉투를 건네며 뭔가를 다짐했는데, 그 내용은 흐려지고 잊혀졌다. 대신 돌아오는 버스에서 J는 모친의 연명치료중단에 대한 도의적 책임이 J 자신에게 있는 거나 다름없다는 얘기를 부친에게 건넸고, 그 순간 잊혀졌던 스스로의 다짐은 이 일로 울지 않겠다는 식으로 기억되었다.

 

특정한 감각은 어떤 기억을 지체없이 호명해내고 만다는 얘기를, 물안개 젖은 호숫가의 습기찬 땅냄새를 맡으며 J는 떠올렸다. 세상에는 다짐과 약속이라는 게 너무 많았다. 다짐과 다짐이 부딪치고 약속과 약속이 싸웠다. J는 발걸음을 돌려 근처 편의점으로 갔고 거기서 보드카와 토닉워터를 샀다. 이번에도 특정한 감각은 특정한 기억을 떠올려줄 거라고 되뇌었다. 편의점 직원은 토닉워터가 여기에 없을리가 없지 않겠냐고 되묻고는 쉬이 찾아 건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