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3.07.29. 친구

낡은등대 2023. 7. 30. 14:37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그는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집 근처에서 만났다. 멀리 갈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는 언제나 그렇게 입고 나왔다.

매번 그의 집 근처에서 만나는 것이 내 특별한 배려는 아니었다. 차를 가지고 있는 쪽은 나였으니 이동권은 보통 내게 더 주어져 있던 것뿐이었다.

이동권이 나에게 있는 것에 반대하여 편하게 입을 권리는 그쪽에게 있는 것 같았다. 가끔 그의 편안한 복장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권리를 항변하는 것 같았고 때로는 이동권이 나에게만 주어져있다는 느낌을 불편해할 나를 배려해주는 의식같기도 했다. 헷갈리는만큼 나는 그의 속내를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잠깐 배회하였지만 이내 술집을 정해 들어갔다.

누가 가게를 정하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리는 내가 골랐고 메뉴는 그가 골랐다.

중년의 남성 한 명이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그의 아들인 것 같았는데, 내가 화장실로 들어갈 때 그 안에서 라이터로 불장난을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도망갔다.

사방이 놀이터로 보일 나이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소년의 놀이터가 안전하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술집에는 "금발의 미녀 20명 입장 시 50%할인", "여성분이 푸쉬업 100회 하면 30%할인" 등의 문구가 써 있었다.

친구에게 이 얘기를 꺼낼까 했지만 하지 않았다.

그는 NGO에서 일하고 있다. 그가 이 동네를 원해서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 발화하면 다른 누군가는 꼭 그 말을 이어서 대화를 이어갔다.

상상력이 빈곤해질 때가 되면 대화가 끊겼는데 그 공백은 자주 생겨서 그 틈으로 옆 테이블에 앉은 단체 손님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밀려들어왔다.

 

직장의 불안정함과 생활비의 문제를 그는 이야기했다.

감추고 싶었으나 미처 숨겨지지 않는 불안이 취기와 함께 스며나오는 것인지

벗인 나에게 곤궁함의 사실을 감추고 싶지 않은 것인지

나는 미처 판단하지 못했고 나의 말은 이리저리 허둥댔다.

그는 술이 떨어지기도 전에 연거푸 시켰고 나는 그에 맞추어 안주를 주문했다.

 

그의 집 근처에서 만났으므로 그만 가자는 말을 할 권리는 보통 멀리 사는 나에게 있었다.

그를 만난지 오래되었으나 이 말을 그가 먼저 꺼낸 날은 드물었다.

나는 내심으로 예정한 시각보다 30분 늦게 그 말을 꺼냈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는 슬리퍼를 끌며 가게 출구의 문을 열었고 마침 들어오려던 소년과 부딪칠 뻔 했다. 그의 슬리퍼와 소년의 런닝구 모두 편안해보였다.

소년은 그를 지나쳐 가게로 뛰어 들어와 주인 중년 남성에게 안겼다. 주인의 두 팔이 아이를 향했으므로 나는 영수증을 버려달라고 하지 못하고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밤의 어두움은 골목길의 네온사인으로 어수선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