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오브 맨, 희망을 품을 자격
디스토피아
영화 <김씨표류기>에서 정재영이 분한 남자 김 씨는 무인도에서 날 것들을 구워 먹으며 연명한다. 강 너머 빌딩들이 숲을 이룬 도시 공동체에서 발휘할 길이 없었던 그의 생존 능력 덕분에 더 이상 무언가를 먹을 걱정을 덜게 되자 김 씨는 짜파게티가 당긴다. 난 이 영화를 VOD로 시청하다 미처 끝을 보지 못하고 잠들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자극적인 맛을 갈구하게 된 김 씨가 자기 몸에서 나는 땀이 짜다는 사실을 깨닫고 쉴 새 없이 자기 몸을 핥아대는 장면이었다. 난 왜 그 사실을 몰랐을까. 김 씨는 왜 우연히 그 사실을 겨우 발견했던 걸까. 땀을 흘릴 만큼 몸을 굴려가며 일하지 않은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사실 그 날도 라면을 먹고 포만감을 이기지 못해 잠들었던 만큼 얼마든지 짠 맛을 즐길 수 있는, 분업의 모태에서 나와 못구할 게 더 이상 없는 도시 공동체 일원이기 때문이겠다. 자극에 쉽게 질려버리는 인류의 탁월한 적응력은 극한을 창조해내어 구현 가능한 모든 것의 최대치를 세상에 늘어놓는다. 가장 높은 마천루, 가장 거대한 수족관, 가장 효율적인 발전소.
"이 라면 맵다"라는 입소문을 타기 위해 사람들이 이미 익숙해진 매운 맛의 수준을 갱신해야 하는 것처럼, 영화의 장르적 성격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더 독한 장치들이 필요한 모양이다. <아수라>에서 느꼈는데, 마초적 영화가 범람하는 시대에 수컷들의 체취를 더 독하게 전달하기 위해 감독이 배치한 말초적 수준의 폭력과 검열되지 않은 잔혹한 묘사, 불편하고 둔탁한 타격음은 진짜 과잉이었다. 하지만 <신세계>, <내부자들>의 흥행을 지켜 본 제작자들이 이를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을 이길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인류의 종말 직전을 그린 <칠드런 오브 맨>은, 동어 반복이지만, 디스토피아적이다. 인간들의 세상이 망해간다는 스토리를 위해 인간이 더 이상 임신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 디스토피아적인 설정이 있을까.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가 마주한 지금 이곳은 과연 어디일까.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중간 즈음 어디일까, 혹은 우리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디스토피아의 마지막 생존자들일까. 우리는 이미 종간의 혐오가 팽배하고 자연환경의 균형이 무너져 버렸고 생명에 대한 존중이 조금도 없는 말세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희망의 자격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더해보자면, 이 영화에서 흑인 소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이는 그야말로 인류의 희망이다. 종의 지속을 보장해줄 수 있는 연구에 기반을 마련해줄 뿐 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소망이 사라진 인간들에게 심리적으로도 위안을 줄 것이다. 한 번도 갓난아기를 보지 못했을 군인, 반정부 활동가, 민간인 모두 전장 한 가운데에서 아이의 울음 소리에 총성을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성호를 긋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회자되는데, 더 대단한 명장면이 바로 뒤에 이어진다. 아이와 일행이 건물 밖을 벗어나 한참 걸어나간 즈음, 건물에서 다시 총성이 울려퍼지고 군인들은 전부 다시 전투 태세에 돌입한다. 다시 건물 안 사람들과 건물 밖 군인을 향한 교전이 벌어지고 덤덤하게 그려냈던 것처럼 또 수많은 사람들이 프레임의 안팎에서 죽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찬사를 담아서 살육하는 것처럼 보였다. 최연소자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 다음 최연소가 되었을지 모르는 누군가를 향해 총을 겨누고, 갓난아이의 사회적 의미를 높이 사면서 누군가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이에게 폭탄을 던지는 우리는 생명이 주는 희망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주인공의 사촌처럼 솔직하게 "난 미래를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질문받을 때, 나는 미래와 생명, 희망이라는 단어를 감히 입에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