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신비한 동물사전, 노마지의 이성에 대한 옐로카드

낡은등대 2016. 12. 6. 21:13

 

  (매우) 편협하지만 난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애완동물에 불과하고, 우리는 인간의 종적 우월성을 주인이라는 개념으로 재확인받고 있는 게 아닌가. 난 애시당초 우리가 동물을 포함한 타종을 사랑하는 마음이 발현되려면 적어도 우리가 도시확장으로 차지한 지구 공간의 단 몇 퍼센트라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처에 깔인 공장에서 쏟아져나오는 제품의 편리를 포기하지 못하면서 동물을 사랑한다니, 난 그 점이 멍청하거나 게으르거나, 혹은 악한 거다 싶다. 원래대로라면 잘 살고 있어야 할 늑대의 후예를 우리는 무슨 권리로 그들의 생존공간에서 잡아들여 아파트에 끌고온건지.

 

  <동물사전>에 나온 주인공을 보며 마찬가지라고 처음엔 생각했다. 물론 삶의 처소를 빼앗긴 이들에게 새로운 공간을 마련해주려는 시도는 너무나 고고하지만 가끔 보이는 우월적 태도는 나같은 레알 프로불편러에겐 불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 인간의 종적 우월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리고 평을 내리려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러한 수직적 관계가 다른 데서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 노마지(인간)와 마녀. 마법사들은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도시를 자신들의 능력으로 회복시키고 마법의 등장을 목격한 인간들의 기억을 싸그리 삭제한다. 이 진행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인간이 우월함으로 내세운 가장 큰 능력이 비로 이성이기 때문이다. 이성이 마법으로 통제되고,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기억하고 사고할 권리와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건 그야말로 인간의 수치 아닌가.

 

  나는 이러한 설정을 보고 내심 분노가 일었는데, 원래는 침묵으로 찾아온 평화가 뭔 소용이냐 같은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따지고 오해하고 삿대질할 권리를 마녀들이 빼앗는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빼앗은 권리의 종류는 생존권이 아니던가, 라는 생각에 도달하니 오히려 참 좋은 한 수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얘기가 스크린에서 처음 전달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사실 이런 옐로우카드를 수십장 받고도 퇴장치 않았으니 더 경고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