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공격당하는 결핍에 대한 단상
1. 한지아와 이선의 관계에 보라가 들어오기 전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영화 한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보라가 집중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여름 방학이 끝난 후의 개학 이후를 일종의 2부로 봐도 괜찮다 싶다.
2. 이선이 한지아를 위해 오이김밥을 싸달라고 엄마에게 애교공세를 떨 때, 문 틈으로 이 과정을 바라본 한지아는 엄마의 부재를 느낀다. 한지아는 이후 이선 가정의 경제력에 대해 은근한 시비를 거는데, 이들은 2부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화해한다. 경제력이 없는 아빠, 애정을 쏟지 못하는 엄마. 서로의 결핍에 대한 배려없는 태도를 공격적인 무언가로 인지하고 미안해할 줄 아는 아이들은, 한지아의 대사대로 "어른들은 왜 이러냐"라고 어른들에게 일갈할 만 하다.
3. 라고 생각하려 했는데 2부가 시작됐다. 그 전운은 상당히 조마조마했다.
4. '한 패'였던 보라와 한지아가 갈라서게 된 계기는 표면적으로 전학 온 한지아가 토착 1등 보라를 꺽고 시험에서 최우수 성적을 거둔 것이다. 이선의 시선에 따르면 보라는 이에 대해 결핍을 느낀 모양이고(이 영화의 짜임새는 정말 군더더기 없이 온전하고 효율적이다), 보라는 한지아를 주변인으로 내몰기 시작한다. 정량적인 지표는 상당히 강력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줄 세우기도 일종의 정량적인 것이라는 데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보라를 미워하기가 어렵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같은 논제로 공격하기엔 그녀는 주어진 과업에 최선을 다하는 초등학교 4학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5. 알콜중독자 아빠를 뒀다는, 새로운 왕따 조건이 붙어버린 이선을 쓰다듬기 위해서 이선의 아빠에게 술병을 빼앗기도 어려운데, 그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생활고에 대한 나름의 사정이 있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선은 가족과도 한지아와도 가지 못한 바다를, 그동안 그녀 아버지의 주량을 채워왔던 할아버지의 유골을 모시는 차 가게 된다. 원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 모양새로 찾아오고, 그 외연에서는 여러 사연이 얽혀 풀어지기 어려운 형세로 굳어져 있다는 것을, 이선도 아빠의 나이가 되면 알게 될까.
6. 명대사로 회자되는 모양이던데, 이선의 동생은 그녀에게 "때리고 또 때리고 또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라고 묻는다. 중요한 건 이 다음 대사로, 동생은 엄마의 알람을 조용히 끄고 엄마 대신 내다 팔 김밥을 말고 있는 이선에게 "누나가 김밥 다 쌀거야?"라고 뜬금없이 일갈한다. 문제는 이 대사가 너무나 합리적으로 들린다는 건데, 사실 이선은 김밥을 다 쌀 수도 없고 가게에 내다 팔 수도 없다. 코흘리개 동생의 언제 노냐는 질문은 뒤에 이어진 이 합리적인 일갈과 더해져 영락없는 현자의 대사로 변모한다. 그래서 나는 정말 진심으로 감독이 이것을 해답으로 여긴 것인지 궁금하다.
7. 이 시점 이후, 피구활동 중 선을 밟았다는 이유로 한지아를 아웃시키려는 일당에게 이선은 한지아가 선을 밟지 않았다며 그녀를 두둔하는 장면이 전개된다. 고고함은 아름답고 영롱한 것이지만, 초등학교 4학년 아이의 깨끗한 얼굴에서 고고함을 보게 되는 건 다소 고역이었다. 같이 영화를 본 이의 반응대로, "왜 선이가... 먼저..." 이런 탄식을 하는 건, 맑은 아이들의 얼굴에 빚을 지고 내내 공감을 이끌어 낸 영화의 탓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혹은 어느 평론가의 말대로 "우리들"이 된다는 건 그 정도의 종교성에 걸맞는 고고함을 요구한다는 의미인 걸까.
8. 총체적으로, 내가 다른 영화감독 중 한 명이었다면, 이렇게 멋진 영화를 마주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