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사인(死因)은 무엇인가요
(스포 있습니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정서적 상태를 마주하고 자신의 무감정을 해체하려는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아내가 죽기 전 냉장고를 고쳐내라고 닥달한 것을 떠올리고 냉장고 문을 열어보는데, 그 안에는 천장에서 떨어진 물을 받아내고 있는 접시와 함께 "나를 고쳐주세요"라는 아내의 쪽지가 놓여져 있다. 데이비스의 해체 작업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냉장고를 가차없이 뜯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돈을 먹어버린 자판기 회사의 고객응대직원인 캐런(나오미 왓츠)에게 자신의 감정의 날 것까지 풀어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작업은 참으로 무식하게도 결혼 생활의 공간이었던 자신과 아내의 집을 물리적으로 때려부수는 것으로 연결되는데, 거기서 데이비스는 자신이 몰랐던 아내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고(아내의 서랍의 파편 속에서 초음파 사진을 찾아낸다), 그녀가 실은 다른 남자와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을 장모로부터 듣는다.
이 후 데이비스는 차 안에서 울음을 터뜨리는데, 이 장면은 영화 초반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울음이 나오지 않아 거울을 보며 울음 연기를 억지로 해보는 샷과 대비된다. 적막 속에서 터져 나온 데이비스의 흐느낌을 가지고서 스스로도 아리송했던 자신의 무감정에 대한 원인을 드디어 파악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과하겠지만, 적어도 데이비스는 이 울음 이후 자신의 감정과 아내와의 관계에 대한 태도를 어느 정도 정리한 것임은 틀림없다. 아내 줄리아의 이름으로 장학 재단을 설립하는 것에 대해 도무지 결정을 못하던 그가 그녀의 이름을 건 회전 목마를 해변에 설치한 것을 보면 말이다.
씨네21의 허지웅의 평대로 데이비스와 줄리아의 관계는 이미 죽어 있었고 이미 죽어 있다는 걸 물리적 죽음 이후에 데이비스는 실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대체 왜 그들의 관계가 죽어있던 건지 자신 나름대로 찾아본 것일텐데, 나는 데이비스가 다다른 해답이 조금은 아리송하다. 무감정의 원인이라 할 만한 관계의 죽음이 아내의 외도일 수 있을까. 아내의 죽음을 마주한 이후 느껴지는 무감정에 자신도 몰랐던 아내의 부정이 영향을 미쳤던 걸까. 선험적으로 느꼈던 남편의 촉은 이렇게나 위대하다는 걸까. 관계의 죽음에 대해선 어떤 특별한 이벤트가 지배적이기 어렵지 않던가. 마치 그건 노화로 사망한 이의 사망 진단서에 폐렴이라고 써있다고 해서 폐렴을 막지 못한 보건당국을 탓하는 것과 같다. 고령에 다다렀기에 폐렴이 크리티컬해진 것이고, 관계가 소원해졌기에 우리는 치약짜는 법을 가지고도 싸우고 헤어지는 것 아닌가. 데이비스는 서랍 속에 감추어졌던 그녀의 비밀이 드러나지 않았어도 관계 살인의 공범이고, 관계의 사인은 폐렴이든 뭐든 아무거나 써도 되는 공란이다. 그래서 나는 데이비스의 울음이 자신이 공범이라는 것과 해체 끝에 답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마주한 허탄함이길 바란다.
솔직함이 모이면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아 떠난 캐런의 아들은 분명히 데이비스의 영향을 받았을 터이다. "아저씨는 솔직 빼면 시체"라고 하던 꼬마는 결국 아저씨에게 솔직해지고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도 솔직해진다. 그것에 대한 표현 방법에 대해 데이비스에게 자문을 구하는데, 데이비스는 나중에 큰 도시에 가서 솔직해지는 게 어떻겠냐, 라고 타협적인 답을 해주지만, 그 꼬마는 아무래도 큰 도시로 갈 만한 때를 기다리지 못했는지 클럽에서 나온 직후 어떤 무리에게 심하게 구타 당한다.
"솔직함"에 대해 어떠한 반론도 허용하지 않을 셈을 가지고 있는지, 반박 불가한 성적 지향을 앞세우고 있으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는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렵지만, 꼬마를 폭행한 이들의 혐오 감정도 왜곡없이 솔직히 분출 되었을 것이다. 솔직함들이 같이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것을 모색해야 할까. 우리는 솔직해지기 위해 어떤 것을 덧입어야 할까. 그럼, 그것은 솔직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참을성 없는 꼬마도 클럽에서 춤을 출 수 있는 세상이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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