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86

토리와 로키타

(스포) 1. 증인 마지막 숲 속에서의 카메라 워킹과 프레임. 마피아가 범행현장으로부터 도주하는 씬에서의 카메라 시선을 미루어볼 때 카메라는 증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범인인 마피아도, 생존자인 토리도 아닌 그 현장의 사실을 증언하는 시선이다. 그 시선은 로키타의 주검과 총상을 끝내 비추지 않는다. 로키타에게 강요된 성범죄에 대해서도 카메라는 프레임에서 로키타의 몸을 이탈시킨다. 시점은 이탈된 것 같지만 여전히 시선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저 고통을 착취할 뿐 기억하지 않는 시선이 세간에 많지만, 영화는 착취적이지 않은 기록물로 증언하는 것 같다. 2. 사람의 떨림 그 증언의 주체는 누구인가. 호흡하고 맥박이 뛰는 사람일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존재라는 과제로 미세한 떨림이 삶에 흐르는 우리. 다르덴 ..

영화이야기 2023.05.21

헝거(2008)

정치범의 지위를 박탈 당한 북아일랜드 수감자들은 죄수복을 거부하고 오물을 벽에 바르다가 단식 투쟁에까지 이른다. 그야말로 육체를 유지하는 의식주에 대한 것인데 황진미 칼럼니스트는 이에 대해 '사회적 의미가 박탈된 개인은 짐승과 다름없는 호모 사케르로, 호모 사케르로 취급하는 영국 정부에 대해 호모 사케르로 밀어붙인 것'이라고 했다. 생명을 바치는 것처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함은 없다. 몸에 대해 가장 가까운 것이 몸을 초월하는 가장 숭고한 것이라니, 인간이 어디까지 온 것인지 온 것인지 가고 있는 것인지 태초로부터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생각으로 구성되지 않는 느낌이 떠돈다.

영화이야기 2023.04.09

다음소희

1. 다큐멘터리와의 경계 : 경찰의 시선을 빌리는 편리함. 위해의 이력 및 가해가능성이 없는 권력자의 시선을 빌린 부조리의 해체. 추적 60분 같은. 영화의 쾌감은 낮아. 2. 인센티브 : 인사담당자로서, 공기업의 인센티브를 증오스럽게 볼 것도, 소희의 인센티브 욕심을 부끄럽게 숨길 것도 아니야. 노동의 대가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 그만큼 인센티브는 가시성이 높아야. 그리고 보상을 포함한 근로조건에 대한 투명한 소통은 반드시 필요해.

영화이야기 2023.02.27

마루 밑 아리에티

물방울이 내 몸 만해서 몇번의 손짓으로 옷에 묻은 모든 물을 떨어낼 수 있는 아리에티의 세계가 쇼의 세계와 같을 수 없는 것은 물의 표면장력의 세기와 모양이 서로에게 다르기 때문이겠지. 마음의 근력과 삶의 중력이 우리 모두에게 다르므로 우리의 세계도 서로에게 다를거야. 그러니 겁을 먹은 서로의 불가해한 세계를 끌어안는 것은 이해와 운명을 넘어서는 거겠지. 고양이를 마주한 아리에티처럼 아리에티를 바라보는 고양이처럼 흔들리는 눈빛이더라도 우리의 불완전한 마음을 서로 주시하는 능력은, 쇼의 작은 각설탕과 아리에티의 커다란 머리집게처럼 심장의 일부가 되어 서로의 세계를 우주로 엮어낼거야.

영화이야기 2022.07.11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H에 대한 단상

1. 네 앞에서 말할 수 없어서 기억해야 했고, 기억해야 해서 응시해야 했던 날들을 기억해. 엘로이즈의 얼굴을 기억했다가 후에 초상을 그려야했던 마리안느의 시선을 보면서. 2. 돌아보기. 오르페우스의 선택인지 에우리디케의 호명인지 모르겠지만, 기억이라는 건 28쪽에 남긴 그림이나 작은 초상처럼 가만히 멈춰있겠지. 네 얼굴이 내 앞에서 끊임없이 요동할 수 있다면, 음악을 듣는 엘로이즈의 마지막 얼굴처럼.

영화이야기 2021.01.03

어둠 속의 댄서

"뮤지컬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아요" 끔찍한 일들을 겪고있는 셀마에겐 뮤지컬의 비현실적인 환상이 필요했을 거 같아. 현실에선 누구도 거리에서 탭댄스를 추지 않지만 그렇다고 뮤지컬을 꿈꿀 자유조차 없는건 아니니까. 삶의 곤고함을 잊어낼 아편. 마지막 걸음을 완주하게 해줄 아편같은 것. 영화 속에서 셀마가 뮤지컬을 상상하는 장면은 일상의 장면들과는 달리 유난히 높은 채도로 화면이 그려지는 것처럼, 내 삶에서도 아편같은 순간들을 생각하면 바보같은 웃음이 나오면서 내 만성적인 우울감은 화면밖 어딘가로 불편하고 무거운 짐들은 다음 시퀀스 어디쯤으로 밀려나간다.

영화이야기 2020.06.07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단상

친구에게 겨우 살아내는 것들이 좋다고 했다. 아이러니 속에서도 꾸역꾸역 살아내는 인생 같은 것 말이다. 내 얘길 듣고 그 친구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추천했다. 내가 생각했던 "꾸역꾸역"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에너지가 마츠코 삶에서 느껴졌지만, 그런 긍정성과 경쾌함이 더욱 삶의 아이러니를 드러내고 영화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 생의 부정성을 부각시키는 것 같아 좋았다. 네이버 평점에서 어느 네티즌(dolp****)은, "끝날 줄 알았던 인생은 계속되지만, 다시 시작하고자 했을때는 끝나버리는 아이러니한 인생" 이라고 평했다. 죽고자 함이 실패되는 것과 살고자 함이 좌절되는 것, 무엇이 더 애잔한 걸까. 아무튼 마츠코의 일생은 위 두가지의 경우들로 요약 가능한 일생이었고 위 ..

영화이야기 2020.01.01

미드소마, 신체, 운명론, 관습

1. 벌거벗은 육체가 춤을 추고, 해부된 사체가 동식물에게 부자연스럽게 이식되고, 부상당하고 파괴된 신체의 단면이 여과없이 노출되면 그순간 인간 자체가 대상화된다. 평상시 우리 인간종의 특별함에서 자연스레 나온다고 믿고 있는 존엄과 자연권이 별안간 저멀리 떨어져나간다. 이때의 각성적인 쾌감이 있다. 사실 우리도 별거 아니었다는 새롭지 않은 불안은 우리를 새로운 인식의 단계로 상승시킨다. 2. 또하나, 감독의 전작 유전과 마찬가지로 운명론적인 냄새가 난다. 어차피 될놈될인 어떠한 질서.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무화되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그 자리를 채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무기력하지만 한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한 이야기다. 역시 여기에도 쾌감이 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가 불..

영화이야기 2019.12.31

아이엠러브, 감각의 탐미

H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고등학생 시절 자신에게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하루키 소설을 읽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그 글들을 추천해주게 되었는데 외설적인 것에 대한, 그리고 어쩌면 외설적인 것을 추천해주는 자신에 대한 친구들의 당혹스러움과 거부감을 느꼈다고 말이다. (난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H는 아이엠러브를 추천했다. ("사려깊게"도 내 취향은 아닐수도 있다는 H다운 멘트까지 덧붙였다) 탐미적인 영화였다. 음악, 숏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성애 장면까지 모두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이탈리아 만찬처럼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감각적이었다. H는 본인이 느꼈던 친구들의 거부감을 말하면서 꼭 성애장면을 느끼라고 그 소설들을 추천했던 건 아니라고 했다. 지레 짐작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섹스는 육체, 감각,..

영화이야기 2019.12.29

다가오는 것들, 철학적인 삶?

J는 어느날 내게 죽고 싶다고 했다. 그 사람에게 가끔 들었던 말이었지만 그날따라 덜컥 겁이 났다. 정말 자살을 각오한 것 같진 않았지만 삶에 대하여, 가족을 황망히 잃은 상실감에 대하여, 복잡해진 인간관계에 대하여, 남은 가족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본인의 처지에 대하여, 그 밖에 자신을 옭아매는 것들로부터 지쳐버린 것이 명료하게도 내게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순간 진정으로 날 탓했다. 생을 아우르는 거대한 목적 따윈 없고 생존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삶을 꽉꽉 눌러채우고 있는 것 뿐이라며 내 잡소리를 몇번이고 지껄였던 것을 말이다. 삶에 불쑥 나타나는 사건들에 대한 나탈리(이자벨 위페르)의 처연한 태도가 떠오른다. 하지만 나탈리는 파비앵(그녀의 급진주의 제자)의 지적처럼 사실 앎과 삶을 치밀하게 동일선..

영화이야기 2019.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