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은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미(美)는 관찰자로 하여금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게 한다고 했다. 그래서 진정한 미는 만져지는 것이 아니라 관조되는 것이며, 미는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는 소비될 수 없고 실용성은 미와 앙립할 수 없게 된다.
「원더휠」에서의 비극이 "회귀"와 "배역"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느꼈다. 지니(케이트 윈슬렛)는 자신의 인생이 "종업원"을 연기하는 조연과 같다고 느끼는데, 그 자기환멸적인 상황의 탈출구로 믹키(저스틴 팀버레이크)와의 만남이 시작됐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서사에서조차 자신은 사실 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지긋지긋한 자신의 배역은 회귀한다.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추(醜)한 것인가.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만지고 싶어하고 그 사람의 세계에서 내 자리를 지켜내고 싶어하는 주연에 대한 욕심은 그 자체로 대상이 아름다울 수 없음을 파멸적으로 증명해낸다.
(정말로 에로스란 이상하다. 불장난이 만들어낸 파국의 경험과, "따져봤을 때 캐롤라이나보다 지니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는 철학 전공 친구의 이성적인 조언도, 믹키를 향한 지니의, 또 캐롤라이나를 향한 믹키의 방향성을 돌려놓지 못했다. 정말 이건 눈 먼 운동성이다. 그리고 이 이상하기 짝이 없는 감정은 인간에게 또 어찌 그리 중요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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