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안 부세주르는 피아노를 잘 쳤으니 내게도 피아노 연주를 들려달라는 요구에 조용히 피아노 덮개를 닫으며 자기도 그런 얘기는 들었었노라 스파이임을 드러내는 아내(마리옹 꼬띠아르)에게, 맥스 바탄(브래드 피트)은 자신을 향한 사랑은 진심이었냐고 묻는다. 그리고 아내가 진심을 몇 마디에 담아 고백했을 때 그것으로 족한 것으로 보였다. 수사당국에 둘러쌓여 탈출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때 일어난 그녀의 자살 역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몸부림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야 할 남편의 슬픔을 대신 거둬주는 숭고한 사랑으로 느껴졌다.
굉장히 긴 사간에 걸쳐 마리안의 의혹을 파헤쳐가는 과정에 비해 불신의 해소는 순식간에 이뤄진 느낌이다. 의혹의 깊이가 깊었던 걸까, 혹은 관계에 생겨버린 골을 채우고도 남을만큼 사랑이 넉넉했던 걸까. 어찌되었든 의혹과 해소 각각에 대한 불공평한 시간 분배는 결론적으로 극적인 효과를 가져온 거 같은데, 그건 두 주인공이 모두 첩보원이라는 데서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을 연기하며 적을 기만하는 데 능숙한만큼, 저들의 외면은 더 수상하고 저들의 내면은 더 가엽고 진실해보이니 말이다. 그러니 외면과 내면이 교차편집되는 순간은 매우 짧아지고 나는 여기서 청량감을 얻은 모양이다.
하지만 사실 첩보원이라는 설정이 마냥 특이하지만은 않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우리가 모두 가면은 쓴 채 사회적 공연을 벌이는 사람들이라고 했으니, 우리도 따지고보면 매순간 간첩이다. 다만 우리는 지령을 받을 데가 많지 않기에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리는 단계가 추가적으로 더 있는 차이랄까. 이 차이 덕에 우리는 우리의 본 모습(혹은 다른 가면의 모습)에 충격받은 상대방에게 거짓된 가면을 용서해달라고 빌 여지가 적어지는 것이고, 외면과 내면 차이를 스스로에게조차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일테다. 청량하게 진심을 고백했던 마리안을 통해 받은 우아함의 느낌은 우리의 이러한 처지로부터 비롯된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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