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한 압축
(스포 있습니다) 영화는 마이클 패스밴더가 분한 톰 만큼이나 과묵해서 특정한 숏들로 상당히 많은 대사와 흐름을 대체한다. 말을 아끼는 와중에 감정을 훌륭히 전달하는 배우들의 열연도 한몫했지만, 절제된
연출력도 돋보였다(이사벨을 마중하던 아버지가 이내 뒤돌아서는 장면을 통하여 두 부부가 섬으로 되돌아가겠노라
결정하는 장면을 대체한 것이라든지, 피아노 조율사의 조율 행위가 단조로운 선율의 BGM으로 넘어간다든지 등의). 빈번히 사용되는 크로스오버도 과할
수 있었지만, 톰의 과묵과 야누스 섬의 고독이 갖는 교집합이 넓기 때문에 사실상 크로스오버로 인지하기도 애매하다. 이사벨이 임종 직전까지 죄의식으로 괴로워한 것, 그리고 루시 그레이스가 손주를 안고 셔본을 찾아온 장면을 마지막에 삽입한 것은 다소 불필요한 진행이었던 것 같아서 극의 막판 흐름이 상당히 수다스러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겠으나(사실 원작 소설 탓이리라),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과묵하다. 따라서 이 영화의 호흡을 쥐고 있는 과묵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겠다.
과묵 / 용서
톰의 매력적인 과묵은 사실 몇 가지 측면에서 물의를 일으킬 만했다. 우선 루시 일과 관련한 자신의 내적 갈등을 이사벨에게 토로하지 않음으로 일방적인 해결 방법을 강구했다는 점. 톰의 갈등 해결이 낳은 결과를 급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이사벨은 그것을 일종의 배신, “사랑하지 않음”으로 충분히 인지할 만 했고, 이어서 언급할 법적 거짓 진술을 할 만큼 남편을 향한 공격성을 드러내고야 만다.
둘째, 톰 자신이 살인을 행했다는 이사벨의 거짓 진술에 반박하지 않았다는 점. 전쟁 내내 독일인을 죽여 온 "전쟁영웅"이라는 사실을 그다지 반겨하지 않는 태도로 미뤄볼 때, 그는 "죄로부터 멀리 도망갈 수 없다"는 명제가 루시 건을 포함한 자신의 전쟁 행위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부분적으로 루시 건에 대하여 자신의 과묵한 의사 결정이 낳은 파국이란 걸 인지한 모양인지 톰은 이를 오히려 반기는 모양새지만, 이것은 정의 앞에서도 그리고 이후 갖게 될 이사벨의 죄의식 앞에서도 옳지 못하다.
따라서 이 영화에 긴장을 불어넣는 갈등의 한 축은 톰의 과묵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 축은 외재적인 것으로서, 두 차례의 걸친 조산을 경험한 등대지기 부부에게 독일인 남성의 시신과 그의 젖먹이 딸이 떠내려왔다는 것이다. 이 후 진행되는 사건들이 말해주는 바에 따르면, 그 독일인 남성은 독일의 패전 이후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을에서 괴롭힘을 당해왔고 그는 "용서는 한 번이면 족하다"는 신념을 통해 일종의 린치를 승화시키며 지내온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실종된 밤, 괴롭힘을 피해 딸과 함께 쪽배를 탄 그 폭풍 속에서도 그가 얼마나 저항치 않는 용서의 태도로 그 상황을 피하고자 했을지 유추할 수가 있다.
물론 "단 번에의 용서"로 요약할 수 있는 그의 태도가 새로운 갈등의 한 축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쉽사리 요약해버릴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용서를 포함하여 그 용서가 발휘되도록 한 집단적 공격성이 이 모든 갈등에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톰의 과묵, 독일인의 용서를 야기한 제1원인, "전쟁"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뒤따라오는 포성의 상흔
결혼을 매개로 이어진 상대방에 대한 성실함, 딸에 대한 어머니의 모성, 규율에 대한 관료출신의 집착. 이런 신파적인 것에 대한 진정성 있는 접근도 유의할 만 하지만 이것들은 파편에 불과하다. 전쟁의 결과는 민족국가의 승패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인생에까지 자리잡아 이명을 만들어낸다. 톰이 고독을 찾아 머문 야누스 섬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결국 피하고자 했던 포성과 다를 바 없이 울리는 것처럼, 포성의 상흔은 사람들을 아주 오랫동안 쫓아오면서 죄의식과 고독, 증오와 용서 의무 속에 가둬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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