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오두막, 영화 속 큰 딸의 눈물에 대하여

낡은등대 2017. 4. 23. 17:00




  (스포 있습니다) 원작을 읽으면서 기성 종교인으로서 느꼈던 기존 교리와의 부조화는 더이상 느낄 수 없도록 단정하게 정리되었다. 소설에서 딸의 몸을 기적적으로 되찾는 부분도 과감하게 삭제되었는데, 그림자뿐인 이 세상에서 신과의 조우가 항상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다.

  하지만 크리스찬으로서 우리에게, 나 스스로에게 늘 부당한 부분이라고 느꼈던 인지 과정이 여지없이 전시되었다고 생각한다. 비단 그것은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원작 소설, 그리고 그것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우리의 시대정신이 갖는 문제이기 때문에 리뷰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조금 부당하겠지만, 그럼에도 이 문제를 나열해보고 싶다.


피해의 사유


  이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심판" 그리고 "용서"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 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상회하는 감정에 의지하여 선과 악을 구분하고 각각에 어울리는 결과와 열매를 기대한다. 그러나 기대하는 규칙에 균열이 가고 바라던 정의로움이 성취되지 않을 때 우리는 공정한 심판자로서의 신의 부재를 느낀다. 이 문제는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기록을 통해서도 제기되는데, 이 영화는 이에 대해 "그렇다면 네가 심판자로서 모든 판결을 정의롭게 내릴 수 있는가"의 의문을 다시 던진다.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의 계획과 진리가 우리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쉽사리 반론을 제기하기 어렵고 성경 속 의인 "욥"의 고백처럼 우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게 될 뿐이다(욥기 40장 4절).


  그런데 공정한 심판의 부재를 처절히 느끼는 건 피고가 아니라 원고로 우리 스스로를 자처할 때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우리는 가해자로서 우리의 형량이 기대에 비해 가볍다고 해서 심판이 공정하지 못했다고 토로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을 침략한 이방인이, 내 소를 훔쳐간 이웃이, 내 딸을 살해한 변태 싸이코가 처벌받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해 우리는 격분한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학대받고 자랐지만 건실하게 가정을 꾸려낸, 비난할 부분이 없어보이는 "맥(맥킨지)"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스스로를 죄인이라 고백하는 우리는 희한하게도 맥의 슬픔과 상처에 몰입한다는 게 이걸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난과 무관하지 않다. 상당히 심리학적이며 때론 이교도적으로 보이는 스스로에 대한 힐링 문화가 기독교 내에 만연하게 번진 원인은, 우리 자신을 은혜와 진리에서 벗어나 절대자와 이웃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로 인지하기보다는, 남들의 험한 말과 악한 꾀에 상처받은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데 능한 우리의 무감각과 교활함에 있다. 


큰 딸의 눈물


  따라서 우리는 경우에 따라 "맥"의 눈물에도 주목해야 하겠지만, 그보다 앞서 큰 딸의 눈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배에서 뛰는 바람에 물에 빠지게 된 아들을 건지기 위해 맥이 자리를 비웠고 그 사이 막내딸이 실종되었는데, 그녀는 이 모든 사건의 책임을 그녀에게 돌리고 있다. 큰 딸은 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아버지와 거리를 두게 되지만, 아버지와의 소원함이 죄책감 때문인 것이 반전이 될 만큼 관객을 포함한 그 누구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을 법하다. 그럼에도 예민한 양심을 가진 큰 딸은 아버지의 위로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만다.


  이 진리의 출발선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가 벌벌 떨며 피고로 재판대에 섰을 때 엉뚱하게도 원고의 아들이 죄를 뒤짚어쓴 채 형벌을 받았고, 그것을 알게 된 우리는 그제서야 용서자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용서"하기"는 용서"받기"보다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용서받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 한디면 족하지만, 용서하기 위해서는 불타는 분노와 적개심을 억누르는 가공할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영화의 선언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우선 큰 딸의 눈물에 공감해야 하는 것이 바른 순서이다. 가진 것 없는 이웃을 헐뜯고 오만한 계산으로 부를 축적하는 교회들에게도 이와 같은 순서는 유효해야 한다. 우리가 준 상처는 우리가 받은 상처에 앞서야 한다. 나는 그것이 크리스찬이라고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