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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탄생을 축하한다는 것이, 태어난 그 날을 축하하는 것임과 동시에 죽은 이들에게는 그 기념이 없으므로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과 마음을 위로하고 보듬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거역할 수 없이 세상에 태어났겠지만 들뜨지 않은 네 모습과 삶이 참 값지다고 두 팔 벌려 안으며 말해줄거야. 하찮은 의미일진대 연약하게 드러나는 네 맨모습을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덮어주어 소스라치게 하는 낯선 외부로부터의 당혹감을 막아주고 싶었고, 그것이 처음 만났던 19년의 그 때에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표현이었던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내 마음이었어서 나의 선물은 표현에 미달한, 그러한 나의 사랑이라고 알려주고 싶어. 24년 9월에

나의 이야기 2024.09.14

철근콘크리트

휴가를 맞아 카페에 있다. 적당히 모던하고 적당히 시원하다. 벽은 하얀 페인트로 단정하게 칠해져있고 천장은 마감되어 있지 않아 회색의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간접조명이 노랗게 가장자리를 비추고 있고 직선의 레일에 달린 조명이 실내를 따뜻하게 밝힌다. 직선의 벽과 직선의 철근. 평평한 콘크리트. 이런 곳은 자연에 없겠지, 상투적인 인상 속에서 나는 자책을 느낀다. 천장에는 LG의 동그란 에어컨이 있다. 마찬가지다, 자연에는 저렇게 동그란 것도 보기 드물 것이다. 자연은 여기 어디 있나? 나, 그래, 나는 유기체니까 자연일 것이다. 그런데 자연의 일부인 나는 자연에 던져져 있지 않음을 감사하다니. 이 만족감에 섞인 내밀한 부도덕함과 함께 내가 자격상실인 존재라는 것을 느끼는데 따지고보면 모든 것이..

나의 이야기 2024.08.16

K, 선임

K는 내 선임이다. 그에게는 힘들었던 하루였다. 술잔을 앞에 두고 자기는 회사원으로 살기 싫었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원으로 10년을 넘게 살았다. 경력직인 나와는 1년도 채 만나지 못했다. 그는 나와 같은 꿈을 꾸었다. 문과생이 꿀 수 있는 꿈이라는 게 기껏해야 몇 개 되지 않는 것이 그래서 대부분 같은 꿈을 꾸게 되는 것이 갑갑한 기분인 건 사실이지만 아무튼 우리는 그때는 그랬었고 그는 지금도 그렇다고 한다. 자기에게 속한 긴 시간을 부정하는 것은 즉흥적인 것은 아니었으리라 짐작했다. 무엇이 그와 나를 매캐한 고기집으로 불러모았는가. 집히는 추측은 없었고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적막과 그것을 애써 눈감게 하는 건배는 우리가 길잃어서는 결국 향방없이 두리번대는 모습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취하기엔 가깝..

나의 이야기 2023.12.13

23.08.05. 고향

나의 고향은 어느덧 세련된 상점들이 늘어선 동네가 되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내심 자랑이었다. 안정적이었지만 유복하게는 자라지 못했고 더많은 기회와 경험을 부모에게 요구할 용기도, 또 요구할만큼의 강렬한 열정도 내게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향의 유명세가 나의 부족한 문화자본을 보상해준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의 맛없던 카페들은 여지없이 망했고 세련된 목재와 깨끗한 콘크리트로 마감하여 모던한 느낌을 주는 새로운 카페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내가 기억하는 가게들은 많지 않아서 내가 가고자했던 카페마저 사라져 버렸다. 어릴 적부터 엄마와 가던 칼국수집은 그대로였다. 엄마는 죽은지 오래되었다. 엄마가 살아있었다면 칼국수를 먹을 수 있었을까, 엄마에게 이 작열하는 태양은 버겁지 않았을까, ..

나의 이야기 2023.08.05

23.07.29. 친구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그는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집 근처에서 만났다. 멀리 갈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는 언제나 그렇게 입고 나왔다. 매번 그의 집 근처에서 만나는 것이 내 특별한 배려는 아니었다. 차를 가지고 있는 쪽은 나였으니 이동권은 보통 내게 더 주어져 있던 것뿐이었다. 이동권이 나에게 있는 것에 반대하여 편하게 입을 권리는 그쪽에게 있는 것 같았다. 가끔 그의 편안한 복장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권리를 항변하는 것 같았고 때로는 이동권이 나에게만 주어져있다는 느낌을 불편해할 나를 배려해주는 의식같기도 했다. 헷갈리는만큼 나는 그의 속내를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잠깐 배회하였지만 이내 술집을 정해 들어갔다...

나의 이야기 2023.07.30

토리와 로키타

(스포) 1. 증인 마지막 숲 속에서의 카메라 워킹과 프레임. 마피아가 범행현장으로부터 도주하는 씬에서의 카메라 시선을 미루어볼 때 카메라는 증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범인인 마피아도, 생존자인 토리도 아닌 그 현장의 사실을 증언하는 시선이다. 그 시선은 로키타의 주검과 총상을 끝내 비추지 않는다. 로키타에게 강요된 성범죄에 대해서도 카메라는 프레임에서 로키타의 몸을 이탈시킨다. 시점은 이탈된 것 같지만 여전히 시선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저 고통을 착취할 뿐 기억하지 않는 시선이 세간에 많지만, 영화는 착취적이지 않은 기록물로 증언하는 것 같다. 2. 사람의 떨림 그 증언의 주체는 누구인가. 호흡하고 맥박이 뛰는 사람일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존재라는 과제로 미세한 떨림이 삶에 흐르는 우리. 다르덴 ..

영화이야기 2023.05.21

23.05.04.

엄마 잘있어? 엄마가 이곳을 떠난지 벌써 5년이 되어가. 나도 더 나이가 들었어. 엄마가 삶을 힘겨워했을 때의 나이야. 그때의 엄마와 내가 친구의 나이라니. 경력직으로 이직한지 1년 정도 되어가고 동료들과 회식을 했어. 내가 일은 어찌 하는지와는 무관하게 나는 항상 겉도는 느낌을 받아. 내가 사는 것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평생에 걸쳐 궁금해하다가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걸 멈췄어. 나는 이상하게 회식을 하고 나면 허무한 기분이 들어. 사람들을 만나서 그런가? 그럼 일하는 건? 일은 무엇을 위하는 건데? 답을 내릴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을 느낄 때 나는 엄마는 서운하겠지만 엄마의 생사를 두고 내가 느꼈던 그 이상한 기분이 떠올라. 난 이제 엄마의 죽음 앞에서 울지 않아. 그 상실감이 무뎌..

나의 이야기 2023.05.04

23.04.26. 붉은 눈

그리운 마음은 때로 통증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퇴근하고 있었다. 운전 중에 잠시 신호에 걸렸다. 그립다는 표현이 적당한 것일까, 생각했다. 내 곁에 있는 것을 그리워한다는 말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 표현은 버리는 게 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이 있다. 눈에 넣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는 거겠지. 하지만 눈에 넣으면 분명히 아플 거야. 눈이 빨갛게 부어오를 테니까. 눈과 마음에 넣어서 부어오른 거야. 앞차가 출발했다. 출발했으니 브레이크등은 꺼졌지만 후미등은 여전히 붉었다. 마치 붉은 눈 같았다. 라디오에서 촌스러운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촌스러운 슬픈 노래가 나와서 그런 생각이 들었나보다. 다음 곡은 가비엔제이의 노래였는데 촌스러운 흥을 깨고 싶지 않아서 채널을 돌렸다. ..

나의 이야기 2023.04.26

헝거(2008)

정치범의 지위를 박탈 당한 북아일랜드 수감자들은 죄수복을 거부하고 오물을 벽에 바르다가 단식 투쟁에까지 이른다. 그야말로 육체를 유지하는 의식주에 대한 것인데 황진미 칼럼니스트는 이에 대해 '사회적 의미가 박탈된 개인은 짐승과 다름없는 호모 사케르로, 호모 사케르로 취급하는 영국 정부에 대해 호모 사케르로 밀어붙인 것'이라고 했다. 생명을 바치는 것처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함은 없다. 몸에 대해 가장 가까운 것이 몸을 초월하는 가장 숭고한 것이라니, 인간이 어디까지 온 것인지 온 것인지 가고 있는 것인지 태초로부터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생각으로 구성되지 않는 느낌이 떠돈다.

영화이야기 2023.04.09

회식의 느낌

회사를 옮긴지는 이제 반년이 됐다. 6년 남짓 다니던 곳을 떠나 이직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 이유가 그만하였는지는 물론이거니와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결정을 내릴 때의 감정선은 어떠하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반년은 그런 시간이었다. 지리한 시간이었다. 나는 원래 말이 적은 사람이다. 그렇다보니 친구도 적다. 그래도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나도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사실 표출된 것은 아니었고 잠시 굳은 내 표정이 사건의 전말이다. 나의 부족을 타인에 대한 칭찬으로 들었던 것이 전부다. 별 일 조차 아니었다. 자기 표현이 부족한 외부인을 탓하는 것이 쉽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실은 또 그만큼 스스로를 약자로 포장하는 것도 쉬운 것이겠..

나의 이야기 2023.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