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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너는 잘 알고 있을거야. 내 삶이 얼마만큼 너로 가득차 있을지, 그리고 네 반응 하나하나에 어떤 생각이 날 다스리고 무슨 감정이 내 시간들을 지배하는지 너는 잘 알고 있을거야. 그러니까 지금까지 잠들지 못하고 네 공간에서 널 생각하고 있는 내 마음도 알겠지. 그렇더라도 애써 말해주고 싶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나는 영원히 네 어쩔 수 없음이기를 원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내 촌스러운 마음은 꼭 비어져나가버리고 네 기민한 생각은 날 항상 먼저 덮어주니까. 잘 알고 있겠지. 그래도 너에게 말하고 싶어. 그런 말들이 있잖아.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서로 알지만 꼭 말하고 싶은 말들이 있잖아,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처럼 말이야.

나의 이야기 2020.12.07

가을 바람 냄새

가을 바람 냄새가 났어요. 그대가 쓰는 말투에서부터 머리카락에 스며든 것까지요. 맞아요, 그건 가을의 냄새였어요. 가을이 오면 저는 가을 바람의 냄새를 알아채요. 그 냄새가 나면 분명히 가을이 와요. 당신에게서 직감했어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당신에게 끌리게 될 거라는 걸 말이에요. 작은 것에 행복하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했었던 걸 기억해요. 당신은 그러지 못한다고요. 부러워하지 말아요.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가 행복한 일은 아니겠지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건 행복한 일이잖아요. 설령 저 혼자만의 생각이라면 어때요. 적어도 한 사람에게만큼은 어떤 사람보다도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걸요. 그 냄새가 나면 분명히 가을이 오는 것처럼 당신은 분명하게도 좋은 사람이에요.

나의 이야기 2020.11.21

어느날 안양에서

그날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소하게 여겨질 일들이 내게는 어렵고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나는 겁이 많았고 약한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는 더욱 그랬고, 그날은 조금 더 힘든 날이었다. 어느 대사처럼 나는 하고싶은 일을 쫓기엔 재능이 없었고 해야할 일을 해내기엔 적성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나는 남루한 사람 같았다. 의무의 일들을 넉넉히 해내면서 여유로운 마음을 일구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알 수 없는 외로움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동료는 지하철을 타고 안양으로 와주었다. 회사의 합병이 있었고, 그 동료는 업무상의 이유로 다른 사무실에서 낯선 사람들과 일하고 있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벤치에 앉아 담배를 세네개피 정도 나눠피웠다. 나는 동료에게 사는 게 힘들다는 식의 한..

나의 이야기 2020.09.06

검정치마 - Everything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소리가 좋다고 얘기하던 너의 나긋한 목소리를 생각해 해가 진 어두운 길에서 우린 어딘가 약해보였겠지만 나란히 걸으며 세상을 무시하고 서로를 쓰다듬었고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소리와 우산의 둘레에 우린 말이 더욱 없었어 그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말조차 필요없는 것처럼 그냥 너와 걷는 날이면 모든 게 내 거였고, 넌 내 모든 거였어 비가 내리는 오늘, 난 그렇게 또 너를 생각해 - 검정치마, Everything을 듣다가. (이하) 검정치마, Everything 가사 - You are my everything My everything My everything You are my everything My everything 비가 내리는 날엔 우리 방안에 누워 아무 말이 없고 감은 눈을 마주보면 ..

나의 이야기 2020.08.09

묻다

뭐든지 묻으면 잘 지워지지 않았다. 잊고 싶은 기억, 관계, 내 과오, 타인의 상처, 또는 그 반대들. 잘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흔적들은 날 쉽게 놔주지 않아서 가끔은 멀리 도망친 것 같다가도 이내 다시 그 기억과 감각으로 날 당겨감았다. 그 사람과 걸었던 길에서 그 사람은 내게 묻었던 먼지와 기억을 털어주었고, 그 길에서 그 사람이 내게 묻었다. 그 사람이 묻은 것들에서 그 사람을 느낀다. 그 사람이 묻은 차에서, 파주에서, 우리가 함께 한숨 뱉어낸 연기에서 그 사람의 안락한 그늘과 따뜻하고 좋은 냄새를 내게로 끌어와 떠올렸고 그것들이 내게서만큼은 지워지지 않기를 조용히 바랐다.

나의 이야기 2020.07.22

그늘진 얼굴

그늘이 진 얼굴. 가만 보면 볼수록 그늘이 깔린 얼굴이었다. 가볍지 않고 무거운 그늘이었다. 그늘의 보편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좋은 일이 있어도 그늘은 거둬지지 않았고 나쁜 일이 생겨도 그늘이 더 짙어지지 않았다. 그늘은 항상 그만큼만 그녀에게 있었다. 그런 그늘이 내게도 있기를 바랐다. 요동하지 않고 세상 너머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 같은 그녀를 동경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만큼 나는 내 자신에게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게로 다가오는 빛과 어둠의 배합에 따라서 내 얼굴의 그림자는 수시로 변덕스럽게 변했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평범이라는 말로 압축해서 말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는 걸 알지만, 그녀는 유난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는 것을 ..

나의 이야기 2020.07.09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가 몇살에 죽었는지 알아? 88살이래 친구랑 술먹다 알았어 미대 전공이니까 팩트겠지 미켈란젤로에 대해 어쩌다가 이야기하다가 미켈란젤로 작품 중에 피에타 이야기가 나왔어 피에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끌어앉은 모친 마리아. 근데 말이야 피에타 가만히 보면 마리아와 예수의 시선이 맞닿지 않는대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 은근히 모성이 다뤄지는 작품이 많은데 말이야, 어미와 자녀가 눈을 맞닿는 일은 전혀 없대 그렇다더라, 피에타처럼 시선이 엇나간대 미대 전공이니까 팩트겠지 미켈란젤로가 엄마를 잃고나서 그랬다나 88살 먹도록 그게 어떻게 해결되지 못한 모양인지 미켈란젤로 작품에는 모성의 상실이 그렇게 마주하지 못하는 시선으로 88살 먹도록 그게 드러난다더라 아무튼 미대 전공이니까 팩트겠지

나의 이야기 2020.07.07

불면증과 꿈

겨우 잠들면 진짜 애써서 겨우 잠들고 나면 기껏 결국 꾼다는 꿈이 현실의 연장이다 여전히 시달리는 문제에 시달리고 쫓기는 생각이 날 따라오고 어지러웠던 감정이 영롱한 색을 칠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 나타난다 그러다 깨면 딱 지금쯤 세시 네시 사이에 깨면 이럴거면 왜 잔건지 세상 잊으려 애써 왜 기껏 잠든건지 이유를 모르겠어 그러면 이건 좀 무서운 말인데 죽어서도 이럴까, 생이 끝나고나서도 쫓기던 일들에 나는 계속 쫓겨서 쫓아오는 것들은 사라져서 없어졌어도 나는 여전히 쫓기는 어떤 마음만 남아있게 될까 그런 무서운 걱정이 든다 괴로운 일들이 세상엔 너무 많고 내 삶은 그걸 받아내기 벅찬 건지 꿈에서마저 세상을 마주대하고 있고 잠에선 깬 지금은 잡을 것을 찾아 따뜻한 핸드폰을 꼭 쥐고 난 부질없이 보고 싶은 ..

나의 이야기 2020.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