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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찾기

공동묘지 드라이브 오늘처럼 잠이 안오는 밤이면 차를 몰고 뒷산에 간다. 코스는 짧지만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다. 거기엔 공동묘지가 있다. 안양시청계공동묘지. 삶을 멈추게 된 사람들의 사연과 유가족의 설명못할 감정들이 묻혀있는 엄중한 장소를 들락날락한다는 말이 무례하지만 조심스레 말하자면 그래서 좋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렇게 대단한 거 같지 않고 사연과 감정도 결국에는 깊이 묻히고마는 거 같다는 그런 위로를 얻게 된다. 고라니 그런데 얼마전에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에 그곳을 갔다가 고라니를 봤다. 고라니가 길을 건너는 걸 정신놓고 차 안에서 쳐다보기만 하다가 고라니가 모습을 감춘 뒤에야 사진을 찍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집에 도착해서야 내 블랙박스가 녹화가 안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뒤로 그곳..

나의 이야기 2020.03.09

친구에게

친구라고 생각해서 내가 선을 넘거든 언제든지 얘기해달란 내게 네가 그랬어. 친구에게 선을 넘는게 어디있냐고. 친구가 되는 순간 그런건 감수하는 거라고. 세네시간 마주앉아 술 한잔 하면서 쉴새없이 떠들고 돌아서도 곧 다시 네 생각이 나는 이유는 친구에게 저런 위로를 해줄 수 있는 네가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이야. 네가 필요해서 좋아한다고 들린다면 사실은 변명이야. 이유 없이 너와 있는 시간이 좋고 막연하지만 기다려질만큼 너는 좋은 사람이야. 너의 외로움과 불안함이 나로 인해 없어지진 않겠지만 내가 너와 함께 하는 시간에 어두운 생각들을 떨쳐낼 수 있듯이 널 응원하는 내 마음이 내가 아끼는 친구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만나서 반가워!

나의 이야기 2020.03.01

먹고 싶은 게 없는 주상절리같은.

사람들은, 물론 나를 포함해서, 너무 많이 먹는 거 같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어. 적정한 수준의 영양소와 포만감 같은 게 있을텐데. 무뎌지는 건지 기준치가 높은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음식물말고도, 자본, 명예, 편의, 내지는 사랑같은 것들 역시 사람들은 자기 필요 이상으로 원하는 거 같아. 그게 어쩌면, 그런 욕망들이 인간을 동물과 구별지어 진화하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다고 말하게 하는 어떤 특성들의 근본적인 동력이 되었던걸까. 내게는 그 동력이 없는 거 같아. 나는 그냥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게 삶 같은데 이런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떠한 욕망이 있다는 것들이 한심하게 여겨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워. 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자기가 주상절리로 태어났어야 한대더라. 그냥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그냥..

나의 이야기 2020.02.13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단상

친구에게 겨우 살아내는 것들이 좋다고 했다. 아이러니 속에서도 꾸역꾸역 살아내는 인생 같은 것 말이다. 내 얘길 듣고 그 친구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추천했다. 내가 생각했던 "꾸역꾸역"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에너지가 마츠코 삶에서 느껴졌지만, 그런 긍정성과 경쾌함이 더욱 삶의 아이러니를 드러내고 영화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 생의 부정성을 부각시키는 것 같아 좋았다. 네이버 평점에서 어느 네티즌(dolp****)은, "끝날 줄 알았던 인생은 계속되지만, 다시 시작하고자 했을때는 끝나버리는 아이러니한 인생" 이라고 평했다. 죽고자 함이 실패되는 것과 살고자 함이 좌절되는 것, 무엇이 더 애잔한 걸까. 아무튼 마츠코의 일생은 위 두가지의 경우들로 요약 가능한 일생이었고 위 ..

영화이야기 2020.01.01

미드소마, 신체, 운명론, 관습

1. 벌거벗은 육체가 춤을 추고, 해부된 사체가 동식물에게 부자연스럽게 이식되고, 부상당하고 파괴된 신체의 단면이 여과없이 노출되면 그순간 인간 자체가 대상화된다. 평상시 우리 인간종의 특별함에서 자연스레 나온다고 믿고 있는 존엄과 자연권이 별안간 저멀리 떨어져나간다. 이때의 각성적인 쾌감이 있다. 사실 우리도 별거 아니었다는 새롭지 않은 불안은 우리를 새로운 인식의 단계로 상승시킨다. 2. 또하나, 감독의 전작 유전과 마찬가지로 운명론적인 냄새가 난다. 어차피 될놈될인 어떠한 질서.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무화되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그 자리를 채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무기력하지만 한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한 이야기다. 역시 여기에도 쾌감이 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가 불..

영화이야기 2019.12.31

아이엠러브, 감각의 탐미

H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고등학생 시절 자신에게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하루키 소설을 읽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그 글들을 추천해주게 되었는데 외설적인 것에 대한, 그리고 어쩌면 외설적인 것을 추천해주는 자신에 대한 친구들의 당혹스러움과 거부감을 느꼈다고 말이다. (난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H는 아이엠러브를 추천했다. ("사려깊게"도 내 취향은 아닐수도 있다는 H다운 멘트까지 덧붙였다) 탐미적인 영화였다. 음악, 숏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성애 장면까지 모두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이탈리아 만찬처럼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감각적이었다. H는 본인이 느꼈던 친구들의 거부감을 말하면서 꼭 성애장면을 느끼라고 그 소설들을 추천했던 건 아니라고 했다. 지레 짐작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섹스는 육체, 감각,..

영화이야기 2019.12.29

다가오는 것들, 철학적인 삶?

J는 어느날 내게 죽고 싶다고 했다. 그 사람에게 가끔 들었던 말이었지만 그날따라 덜컥 겁이 났다. 정말 자살을 각오한 것 같진 않았지만 삶에 대하여, 가족을 황망히 잃은 상실감에 대하여, 복잡해진 인간관계에 대하여, 남은 가족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본인의 처지에 대하여, 그 밖에 자신을 옭아매는 것들로부터 지쳐버린 것이 명료하게도 내게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순간 진정으로 날 탓했다. 생을 아우르는 거대한 목적 따윈 없고 생존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삶을 꽉꽉 눌러채우고 있는 것 뿐이라며 내 잡소리를 몇번이고 지껄였던 것을 말이다. 삶에 불쑥 나타나는 사건들에 대한 나탈리(이자벨 위페르)의 처연한 태도가 떠오른다. 하지만 나탈리는 파비앵(그녀의 급진주의 제자)의 지적처럼 사실 앎과 삶을 치밀하게 동일선..

영화이야기 2019.12.25

피아니스트, 죽음에게

피아니스트를 다시 봤어. 이상한 말이지만 보면서 네가 떠올랐어. 넌 뭔가 음악적인 구석이 있고 그리고 에리카(이자벨 위페르)의 리비도처럼 차마 표출하기 어려운 어떤 욕망처럼 내가 널 원하기 때문이야. 널 원해. 내 맘을 알고나면, 사람들은 날 역겨워할테고 날 벌레보듯 할거야. 하지만 난 널 원해. 널 안고 짙은 어둠으로 침참하고 싶어. 내게 널 알려줘. 너의 깊은 곳까지 보여줘.

영화이야기 2019.12.25

경계선, 단상들

1. 티나와 보레가 숲속을 뛰어다니는 장면. 동족을 만나 억눌렸던 본성을 표현하고 맘껏 나누게 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그런데 동족에 대한 환대는 타자에 대한 배타감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대부분의 배타감의 기원은 그렇지 않나) 2. 보레에게 누굴 해치기 싫어하면 인간이냐고 묻는 장면. 해치기 싫어하는 것도, 의도적으로 해치려는 것도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내가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마저 인간의 전유물이었나..? 3. 티나와 보레의 섹스 장면. 여성/남성, 인간/비인간의 경계가 흐려진다. 모호하고 흐릿한 경계를 보고 있자면 경계선은 유령처럼 존재하는건지 존재하지 않는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영화이야기 2019.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