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없겠죠

낡은등대 2016. 9. 4. 22:41




  저는 영화를 좋아해요. 자본주의 문화를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훌륭한 맑시스트가 되기는 글러먹은 모양입니다.


  어쨌든 영화는 재미있어요. 이야기니까요.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할머니가 해주셨던 고향 저수지 귀신 이야기, 짝꿍이 귓속말로 전해주던 뒷담화, 동네 형의 허세가득한 뻥, 교통 사고 현장에서 잘잘못을 가리는 시끄러운 소음들. 서사는 언제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가던 길을 멈추게 할 정도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물며 영화는, 작정하고 그 서사에 집중하게 만드는 각종 장치들이 배치되어 있는 미디어니까 재미가 있을 수밖에요. 특히나 저처럼 소설책을 지겨워하는 게을러빠진 현대인들에게는 두말할 나위없이 최고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의 행적, 감정, 제스처에 신경을 집중하게 되고 그 순간 주인공은 특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각인됩니다. 그의 이야기는 들을 만한 것으로 우리에게 새겨지고 그의 감정은 우리가 몰입할 만한 어떤 것으로 우리에게 울림을 줍니다. 그건 참 대단한 권력이고 너무나도 탐이 나는 기회에요.


  하지만, 우린 주인공들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필연적으로 놓치게 되는 거 같습니다. 예컨대, <고지전>에서 수없이 죽어가는 무명 전사들의 가족사는 영원히 묻혀버리게 되고 <인사이드 르윈>에서 르윈의 아버지의 청춘은 앞으로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이전에도 없었던 것마냥 다가오잖아요. 엑스트라에 일일이 조명을 비추지 못하는 건 당연히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지만, 한편으론 씁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모두에겐 이야기가 있어요. 그리고 모두는 적어도 자기의 영화와 소설에서만큼은 주인공이겠지요. 130페이지 쯤에서는 실연을 당해 한강에서 홀로 비를 맞으며 택시를 기다리는 찌질한 장면이 나올 수도 있고, 3막에서는 부모님의 간병 비용을 걱정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죽을 만큼 미운 성직자의 애환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애착이 가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제가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누군가도 지금 이 순간, 제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어떻게든,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들일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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