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로 소수자와 관련된 일탈 및 범죄 행위를 접한다. 이러한 채널에서 다수자들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서의 문제에 집중한다. 이러한 맥락은 사회적으로 소수자의 존재 자체가 다수자 및 사회에 대한 위협감으로 여겨지게 한다. 소수자들은 다수자들에게 번거롭고 짐이 될 뿐만 아니라 이미 스스로의 동학에 순종해 움직이는 사회 및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우리가 그들에게 부여했던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지위는 일탈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짊어질 수 있게 하는 기제로 작동해 우리의 방어기제를 보여주는 증표가 된다.
우리가 소수자들을 다수자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으로 파악하는지, 혹은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피동적 약자로 파악하는지 관계없이 이 순간에 소수자들은 우리가 해결해버려야 할 문제로 치환된다. 우리가 소수자들을 우리와 구별된 소수자로, 다수자 및 권력의 중심부의 작동 과정에서 부가적으로 탄생한 산물로 정의내리는 순간, 이 정의에는 적어도 다수자들에게 위협이나 방해 혹은 장애가 되지 않는 차원에서 이들을 다루고자 하는 욕망이 투사된다.
나는 소수자는 다수자들의 소수자이고, 다수자는 소수자들의 다수자라고 생각한다. 소수자들은 다수자들의 행위 양식에서, 다수자들은 소수자들을 향한 다수자들의 반동에서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다수가 존재감을 표현하고, 그 이전에 존재 자체가 규정되는 순간 소수자라는 개념은 동시적으로 배태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소수자는, 그리고 그들이 갖는 문제는 정도와 범위의 문제라기보다 다수자들, 혹은 사회 구성의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소수자들은 우리의 관용의 대상이 아니다. 이 문제는 관용해야 하고 우리가 시혜를 베풀어야할 주제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성인군자와 같은 우리의 덕목으로 말미암아 포기하고 그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지불해야 할 추가적 부담 혹은 도덕적 배려라는 단층에서 침출되는 착하고 어진 배려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존재 양식 및 그에 의지하여 유지되는 모든 생활에 대한 필수불가결하고 당연한 대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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