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86

판도라, 미완성의 반핵

절반은 반핵영화, 절반은 반정부영화 이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정된 시점이 올해 하반기는 아니었을테니 최근의 국정 혼란 사태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가 쓰여진 것은 아니겠지만, 어떠한 시의성이 보편성으로 읽힐 만큼 무능력과 부패가 일상이 되어버린 탓인지 이 영화를 보고 현정부의 모습을 떠올린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나는 문화의 고귀함과 영험함을 숭상한다. 이미 어떤 이야기가 엄청나게 소비되는 와중에 거기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보려는 심산이 빤히 보이는 컨텐츠를 좀 꺼려하게 되던데, 요새 개콘이 그렇고 Bad year를 발표한 산이라는 사람이 그렇고 또 이런 영화들이 좀 그렇다.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들만큼 이 영화는 반정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반관료주의적이고 반부패적인 태도가 적나라하..

영화이야기 2016.12.25

퓨리, 종교와 전쟁

인간이 인간을 해치다 우선 개인적으로 반전(反戰)영화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느낌을 . 에서 받았었는데, 이상의 영화가 "적군"의 인간미를 드러내는 전략을 취했다면 는 "아군"의 잔혹함을 수치스럽게 벗겨내는 방법을 취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는 거 같다. 우리가 전쟁의 참상을 마주하는 지점은 인간성의 훼손인데, 동네를 돌아다니는 미친 개가 아이를 물어죽였다거나 굶주린 계곡의 불곰이 여행객을 해쳤다는 소식을 마주하고서는 전쟁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반전영화는 관객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주인공에 몰입하게 되는 영화 속 불평등을 상쇄시키고자 상대방의 인간적 고고함이나 우리편의 인간적 추함을 영화적 문법에 따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해야 하는데, 는 후자를 택한 모양이다. "워대디(..

영화이야기 2016.12.12

버드맨, 추락의 두려움이 가져다주는 희한한 몰입

고소공포증 굉장한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고소공포증이 진짜 심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는 큰 변수가 되지 않고 오히려 얼마나 높은 위치를 "감각"하고 있는지가 더 크게 다가온다. 롤러코스터를 탈 엄두도 못내지만, 이미 나에겐 높을 곳을 향해 반복적인 기계음을 내며 전진하는 롤러코스터의 상승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후의 있을 하강과 그것의 체험이 자아내는 공포감을 주기엔 충분하다. 이런 기묘한 선(先) 경험적인 공포에 대한 생각을 을 보면서 하게 됐다. 배우가 아니라 연예인이었긴 하지만... 을 보면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부분은 술집에서 리건과 타임지 평론가가 말다툼을 하는 장면이었다. 말다툼이라고 하기엔, 평론가의 태도가 리건 같이 능력 없는 퇴물에게 쓸 에너지가 아깝다는 ..

영화이야기 2016.12.10

경주, 신에게

1. 참 단정하고 정갈한 영화 같았어요. 처럼 대사는 절제되어 있었고 호흡은 차분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 박해일의 외모와 목소리가 주는 인상이 무척이나 영화의 분위기와 닮았었다고 기억합니다. 2. 장률 감독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한 인터뷰에서 그는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듯한 경주의 매력을 언급했다고 하네요. 주인공 윤희(신민아)의 대사처럼 "경주에서는 릉을 보지 않고 살기가 힘들" 정도로 그 곳에는 무덤이 많으니 말입니다. 무덤 앞에서 청춘들이 사랑을 나누고 소풍 온 유치원생들이 줄지어 걸어가는 샷을 찍기 위해 현장에서 사람들을 섭외하여 촬영했다던데,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3. 씨네21의 정한석 평론가의 글대로, 속 경주는 삶과 죽음 뿐만 아니라 실제와 "헛 것"이, "있는 것"과 "느낀 것..

영화이야기 2016.12.06

데몰리션, 감정을 부검하여 관계의 파편을 늘어놓으면

관계의 사인(死因)은 무엇인가요 (스포 있습니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정서적 상태를 마주하고 자신의 무감정을 해체하려는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아내가 죽기 전 냉장고를 고쳐내라고 닥달한 것을 떠올리고 냉장고 문을 열어보는데, 그 안에는 천장에서 떨어진 물을 받아내고 있는 접시와 함께 "나를 고쳐주세요"라는 아내의 쪽지가 놓여져 있다. 데이비스의 해체 작업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냉장고를 가차없이 뜯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돈을 먹어버린 자판기 회사의 고객응대직원인 캐런(나오미 왓츠)에게 자신의 감정의 날 것까지 풀어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작업은 참으로 무식하게도 결혼 생활의 공간이었던 자신과 아내의 집을 물리적으로 때려부..

영화이야기 2016.12.04